모든 삶이 그렇듯 작가 생활도 별 반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일터와 작업실 사이를 번갈아 다니며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이다. 일 이외엔 짬을 내 집안일을 하거나, 서류를 정리하고, 글을 쓰고,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욱여넣고, 고양이를 쓰다듬고, 유튜브를 보고 낄낄대는 것이 전부인 나날이다. 간혹 친구를 만나거나, 전시를 보러 가는 이벤트가 있긴 하지만 아주 가끔일 뿐이다. 어느새 이렇게 틈 없이 작업과 생계형 노동을 병행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지나가는 시간을 따라 해야 할 일이 많아질수록 초조함이란 녀석도 덩달아 커진다. 이따금 스스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헷갈리는데, 이 정도면 작업하는 걸 오히려 열렬한 취미생활쯤으로 여겨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나의 작업 생활은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어렵사리 얻어낸 한 조각이기에 더욱 애틋하다. 쪼개져 버린 삶을 따라 나 자신이 점차 희미해질수록, 주변의 미지근한 사물들은 더욱 선명해진다.
시인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글을 써야만 하는가’를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자문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왜 작업을 해야 하는지, 작업을 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 지금까지 내가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삶과 작업을 따로 떨어뜨리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작업이란 한숨을 내쉬는 것만 같아서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이 무미건조한 삶을 버텨나가기 위해 해야 할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나는 날 닮은 주눅 든 모양에서 느낀 감각적 인상을 즉흥적인 붓질, 애매모호한 형태, 날것의 색으로 펼쳐낸다. 이러한 인상에 대한 묘사는 익숙한 이미지에 달라붙은 허름한 느낌을 벗기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유약한 감정들을 해방시킨다. 이윽고 나는 작업을 통해 삶의 재료를 나름의 형태로 소화해냄으로써 내면에 침잠한 응어리를 내뱉는다. 릴케가 삶의 사소한 순간조차도 갈망의 표시이자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처럼, 내가 본 수많은 순간들과 대상들도 썩 괜찮은 삶의 증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일상 곳곳에 도사리는 가련한 증거를 발견하고 그것을 그릴 때야 비로소 진짜 내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그리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어서 그린다. 주위의 사물들이 어서 그려달라고 꼬셔대면 ‘어휴 어쩔 수 없지’하고 못 이기는 척 붓을 든다. 주변엔 꼭 나같이 생긴 초라한 이미지 파편들이 어슬렁거린다. 언젠가 본 불판 위 타들어가는 마늘 조각, 잎이 떨어져 나간 꽃, 덩그러니 남겨진 성냥개비 같은 것들이 모자란 잔상으로 떠오른다. 나는 하찮은 것들에 스며든 결핍을 나타내는 것으로 부족한 삶의 단면을 다독인다. 때때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개인의 삶을 솔직히 내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정 쓸만한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사소한 것을 작업으로 다루며 그 익숙함에 가려진 허무를 어루만지는 것, 이것이 별거 아닌 내가 예술 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